Description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정법원제도를 신설해서 법률상담과 일상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고 경우를 따져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변혁의 큰 이슈는 농민들의 조세제도 개혁 요구였습니다.
취리히의 교회가 새롭게 바뀌고 사회도 변혁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이자율을 조정하고 소출세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라는 글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를 수용하지 못한 농민들과 수렵인들은 1522년 반기를 들고 시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츠빙글리를 비판하며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취리히를 떠나 재세례파를 결성하였습니다.
스위스 전역으로 확산된 종교개혁
바덴의 공개토론회와 스위스연방공동체의 분열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스위스연방공동체를 향해 번져나가게 되자 스위스 연방 지역대표자회의는 1522년 츠빙글리는 위험한 선동자로 지목하여 위험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대표자회의는 1526년 바덴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때 취리히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카톨릭교회 측에서 요하네스 에크 그리고 개혁교회 측에서 외콜람파디우스가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으로 기존 가톨릭교회 중심의 전통적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는 고립상황에 처해 고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벨과 베른이 취리히의 개혁을 지지하면 나섰고 훗날 제네바의 개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베른의 종교개혁
베른의 군사적으로 강력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과 토호세력이 베른을 장악하고 있어 취리의 개혁 배경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베른이 개혁은 예술과 문화를 통한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성직자의 부패와 모순, 부패, 용병제 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며 비판하였고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527년에 이르러 의회가 강력해지면서 전통 귀족 중심의 도시가 의회중심으로 바뀌었으며 1528년 1월 의회중심의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츠빙글리의 영향 하에 진행되어 교회관과 성경의 권위, 미사, 성자 숭배, 성화, 성직자 결혼 등을 다루어 미사의 폐지와 성화 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제부터 베른은 취리히의 뒤를 따라 교회개혁을 시작했고 이러한 결정은 스위스연방공동체이 세력 다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취리히는 연방공동체 전역으로 개혁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Published 0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