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s
Published 09/13/15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교회사 인식은 신학교에서 시작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세계교회사를 배우지만 사실은 유럽교회사 특히 서유럽교회사에 편중되어 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사는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유럽과 북미가 세계 역사를 구성해 왔으나 이제는 달라졌고 교회사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호주를 포함하는 역사가 되어야만...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발견하였으며 취리히대학에 머물며 경제윤리학자로 그리고 학문의 실천가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에 주목했는데 츠빙글리는 두 개의 법 또는 두 개의 의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 정의의 기초와 목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있으며 특히 산상수훈에서...
Published 09/06/15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정법원제도를 신설해서 법률상담과 일상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고 경우를 따져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변혁의 큰 이슈는 농민들의 조세제도 개혁 요구였습니다. 취리히의 교회가 새롭게 바뀌고 사회도 변혁되는...
Published 08/30/15
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Published 08/23/15
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1551년 츠빙글리는 뮌스터교회를 이끌어 가는 24명의 수사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목회자와 감독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자신의 교회개혁 의지와 구상이 지지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는 ´권위 문제‘에 부딪혀...
Published 08/16/15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Published 08/09/15
1.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 앞서 살펴본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 내부의 정치역학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모든 면에서 이와는 매우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스위스에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즉 중앙집권 정부가 존재한 경험이 전무했으며 지리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기대있어 골짜기마다 작은 부락을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291년 호수가 많은 루체른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마을이 계약연방체를 결성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연방체에 각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점차 발전되었으나 중앙집권체제로 가지는 않았고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할 뿐 각 지역 대표 두 명씩이 정기적 회합을 통해 만장일치로 모든 사안을 의결하는 등 각 지역의 자치권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체제를 굳히게 됩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취리히는 이 계약 공동체에 공동체...
Published 08/02/15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완결편 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루터를 지지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위기상황 1525년에 이르렀을 때 95개조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료 개혁가 또는 지지자들이 다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Published 07/26/15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편 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게 유지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대학동료이자 종교개혁자인 칼 슈타트는 미사 철폐와 설교중심 예배로의 개혁, 전통적 성직자 복장 폐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예배 진행, 고해성사와 사순절 금식의 폐지, 교회의 성화 철거 등 상당히 과격한 개혁을...
Published 07/19/15
1520년 루터의 중요한 저술활동 1.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 당시 중세교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한 루터는 이러한 구조의 타파가 성직자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평신도인 황제와 귀족 등에게 이를 호소하는 글을 씁니다. 즉 독일의 지배세력인 귀족이나 영주 등이 공의회를 주도해야 하고 평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평신도 내부의 계급도 사회유지를 위한 기능적 역할만 할 뿐 근본적으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역할과 기능이 있을 뿐 계급이나 계층을 이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 곧 만인제사장제이며 세속적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의 종교권력 폐지, 성직자의 결혼, 보헤미안에 대한 공정한 대우 및 평화공존, 빈민보호, 대학교육개혁 등을 주장했습니다. 2. “교회의 바벨론 유폐에 대하여” 당시의 교회 상황을 빗대어...
Published 07/12/15
루터의 종교재판 한국교회는 오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로 삼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터가 면죄부 토론을 위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그城 교회 문에 붙인 것을 종교개혁의 시발로 여긴 것입니다. 이 논제의 핵심은 “과연 교회와 사제가 죄의 사면을 위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러나 토론에 응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향은 점차로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이듬해인 1518년 3월 95개 논제들을 요약해서 발표했는데 역시 그 내용은 면죄부는 면죄의 효과가 없고 단순히 건축헌금용이며 차라리 가까이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가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면죄부 판매를 맡았던 ‘테젤’이 소속 수도원을 동원하여 루터를 이단재판에 넘기도록 선동했고 실제로 1518년 혐의입증을 위한 청문회를시작으로 재판과 파문결정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칙령으로...
Published 07/05/15
루터의 사상 형성 과정, 비텐베르그 시절 루터의 비텐베르그 시절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1512년 비텐베르그로 옮겨간 루터는 학문에 몰입하는 한편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편찬하는 등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성경을 이해하는 오리게네스식 방법을 넘어서서 루터는 성경의 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즉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은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경은 기록된 시대에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하신 말씀이며 기록자가 처한 문화와 사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당시 언어로 하신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즉 비로소 복음의 눈으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로부터의 혁명적 변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의 원천은 오직 성경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지는...
Published 06/28/15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가 주창했다기보다는 루터가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이 일에 먼저 나섰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모습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루터만이 아니라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이 공통된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후년에 맞게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원조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고함으로써 세상의 신뢰를 잃고 고립되어 가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가 각성되기를 기대하는 몸부림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루터의 초기 생애와 사상 형성 과정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북부 독일 아이스레베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Published 06/21/15
후스파와 지그문트 왕의 12년전쟁 체코의 벤젤왕이 사망하고 동생인 지그문제의 왕위 계승 시도에 후스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진영간이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때 후스파는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프라하 신앙고백’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되살려낸 것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자유로운 선포, 차별없는 성찬, 성직자의 재산과 정치력 배제, 보헤미아 민족의식 획복 등이었습니다. 양 진영은 1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다가 협상에 들어갔으나 네가지 항목중 성찬에 관한 것에만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존속되었습니다. 후스를 정점으로 한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은 무산된 것이 아니라 체코를 넘어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 마침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교회 개혁의 관점을 떠나 한 시대의 거대한 사회변혁의 물결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15세기 중세...
Published 06/14/15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그동안 지지를 받던 황제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망명길에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르는 마을마다 민중언어인 체코어로 설교함으로써 기존 예배와 차별화된 개혁성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후스는 세 가지 신학사상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10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강해, 사도신경 강해가 그것으로 이후 매우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리와 교회’였습니다. 특히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였던데 반해서 후스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로 이루어진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과 위클리프의 교회론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전통 중세교회와 후스가 주장하는 교회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교황과 사회지배계층으로 대변되는 평신도의 협의체 즉 council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점차...
Published 06/07/15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2015년 5월 31일 방송
Published 05/31/15
2015년은 한국교회로서는 기독교공식선교 130년을 맞는 해이며 종교개혁사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 6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때 ‘맛있는 교회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과 역사를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철목사로 대표되는 저항의 순교와 손양원목사로 대표되는 사랑의 순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본질을 잃고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 교회 갱신을 위해 순교한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살피고 자성함으로써 백색순교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중세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내내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로마제국의 몰락 등으로 세속권력이 교황권을 넘어서게 되자 마침내 교황권이 몰락하면서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등장하게 되면서 점차 웅장한 건물과 피라미드 구조를 지닌 가시적 교회에서 벗어나 성도들이 공동체가 주를 이루는 비가시적...
Published 05/24/15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 등 아픔을 통해 기독교가 확산되고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오히려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는 서울과 피난지 부산으로 확산되는 등 전국으로 그 지경을 넓혀나갔으며 애통의 현장에서 회복을 꿈꾸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기독교의 중심 또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다양한 기독교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석진영의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여러 단계에 걸쳐 숱한 발전과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간략히 표현하자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다문화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 사회를 간략히 다문화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고 또한 이 시대 한국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와...
Published 05/17/15
일제강점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정립된 시기였으며 이 시기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 한편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반부 한국교회는 출애굽의 하나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반기 들어 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면서 고난 받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내면화되었습니다. 한편 신비주의 운동이 일면서 이단이 발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한국교회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과 장로교의 독노회, 총회 조직을 통해 전국적 체계를 갖춤으로써 민족운동을 내부에서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교회와 선교사의 분열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일제에 맞서 일부는 반일정서를 가지고, 일부는 교회와 선교의 유지를 위한 공존을 모색하며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도에서 선교한 로버트 그리어슨은 캐나다의 공식 파송 선교사로서 함경도 지역은 물론 멀리 유랑하는...
Published 05/10/15
구한말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았습니다. 당시 선교가 시작되던 때 우리 나라는 국권을 잃어 임금이 강제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었으나 하늘나라의 임금인 예수가 선포되고 하늘 군대인 교회가 설립되는 영적 회생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대부흥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내용과 형식을 갖춤으로써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헌신했던 선교사들 중 홀 선교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 선교사 중 부인인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선교지 조선에서 잃고도 당시 가장 고통 받던 서북지역 여성 어린이 그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여아를 위해 헌신한 특수 선교의 선구자였습니다. 기홀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시각장애인 시설을 마련하여 봉사하였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교육받는 통합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헌신한 로제타 홀은 남편과 딸, 손자, 아들,...
Published 05/03/15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앙인들은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살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그 방편으로 선교에 뛰어 들어 미지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그 중에서 3개국 6개 교파의 선교사가 조선을 찾아왔는데 당시 ‘선교규정집’에 따르면 이들은 열정 및 헌신도가 높고, 성경 지식이 충만하며,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하고, 의료나 교육 등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조선 땅에서 그분들은 언어와 관습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중 말콤 펜윅과 윌리엄 멕켄지 선교사는 사랑하는 선교지 조선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찬송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이 찬송은 멕켄지 선교사의 파송 예배 때 드린 찬송이기도 합니다. 한편 부부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는 처음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남편이 순회 선교를 위해 몇 주 혹은 몇 달씩 집을 비우면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모든...
Published 04/26/15
천여년 중세교회의 타락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종교개혁교회는 그러나 백여년도 되지 못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는 신앙고백이 지리한 교회교육으로 전락했고 설교 또한 지리한 교뢰 설교로 전락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경건주의운동입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복음서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신앙인의 책무라는 각성에서 출발했으며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고 이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으로 전해진 경건주의운동은 웨슬리 형제에게로 이어졌고 이들은 신대륙선교 등 열정적 선교에 헌신했는데 동생 찰스 웨슬리는 찬송을 통한 영향력 있는 전도운동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편 최근 한국교회도 경건주의 운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이씃ㅂ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영적 성장은 교회의 위기 또는 어려움을 초래해왔는데 이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상실한데서 오는...
Published 04/19/15
종교개혁이란 14~17세기에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으로 보통 16세기 개혁운동을 말합니다. 1. 종교개혁과 결혼 종교개혁자들은 개혁과 함께 결혼을 했는데 이는 강력한 교황권의 바탕이 되는 독신 사제의 영적 우월성 그리고 중세교회 본질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상가요 교사이며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회중찬송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찬송 가운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통일찬송가 384장, 21세기 찬송가 585장)는 가장 널리 불리는 찬송입니다. 2. 종교개혁과 신앙고백 종교개혁 시기에는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등장하는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하나같이 성경이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지, 면죄부의 폐해, 교회가 아니라 성서의 권위 강조, 인간의 노력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음 등을 중심적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찬송가 ‘날 구속하신’(21세기...
Published 04/12/15
중세교회는 7세기 초 그레고리우스 교황으로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는 교황제도와 수도원 운동으로 대표됩니다. 1. 교황제도와 십자군 원정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적 삶은 강력한 교회의 영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막강한 교황권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하여 다수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의 다수의 교파들로 나뉘었습니다. 또한 이슬람교의 시작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마침내 십자군 원정으로 그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군 원정 실패로 교황권이 약화되었고 흑사병의 창궐로 교회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마침내 중세교회의 몰락을 가져오고 끝내 종교개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찬송이 등장하게 되는데 주로 교회의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는 찬송들이었으며 그 중 대표적으로 그레고리 교황에 의한 ‘하나님 아버지 어둔 밤이 지나’(통일찬송가68장,...
Published 04/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