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8] 마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사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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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사상 형성 과정, 비텐베르그 시절 루터의 비텐베르그 시절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1512년 비텐베르그로 옮겨간 루터는 학문에 몰입하는 한편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편찬하는 등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성경을 이해하는 오리게네스식 방법을 넘어서서 루터는 성경의 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즉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은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경은 기록된 시대에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하신 말씀이며 기록자가 처한 문화와 사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당시 언어로 하신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즉 비로소 복음의 눈으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로부터의 혁명적 변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의 원천은 오직 성경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가 되어야 하므로 설교는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며 설교의 중심은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505년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영적시련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 종교개혁에 이를 수밖에 없는 대폭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종교개혁의 폭발적 힘은 성경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말씀의 핵심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무서운 하나님을 만족시켜 의에 이르고자 힘썼던 루터는 참회와 금욕, 고행에도 불구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으며 끝내 율법적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감에 하나님을 증오하기에 이르렀으나 바로 이 말씀에 따라 나 대신 예수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 결과 내게 미쳤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큰 변혁이었고 특히 당시 교회의 성인신앙이 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발화점 면죄부 루터는 이렇게 재발견한 복음을 통해 종교개혁 신학을 세웠고 이 신학은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을 통해 성숙해 갔습니다. 그러한 루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시 기존교회의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당시 면죄부는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일시적 사면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판매되었고 구원과는 무관했으며 교회의 제정 확충과 신도들의 죄에 대한 의식 고양을 위해 운용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성지순례나 십자군 참여 등 몸으로 그 대가를 치르던 것이 1303년에 이르러서는 성베드로 성당 입구에서 돈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면죄부는 발행처인 교황청과 실제 집행자인 마인츠대주교 그리고 화폐를 생산하는 푸그 가문의 3자 역학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신도의 영혼구원을 빙자, 악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중세교회의 대표적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제였던 루터는 거대한 구조악으로 판단했고 이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요청하는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내걸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토론되기를 기대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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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09/13/15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Published 0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