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1] 마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사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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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가 주창했다기보다는 루터가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이 일에 먼저 나섰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모습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루터만이 아니라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이 공통된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후년에 맞게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원조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고함으로써 세상의 신뢰를 잃고 고립되어 가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가 각성되기를 기대하는 몸부림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루터의 초기 생애와 사상 형성 과정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북부 독일 아이스레베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광부였으나 나중에 광산물 제련소를 차려서 소자본가로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9남매의 장남이었고 영민한 편이어서 부친의 기대가 컸던듯합니다. 어려서 라틴어 학교를 거쳐 성당 부설 기숙학교에서 공부했고 부친의 소망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엄한 양친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억압을 매우 심하게 겪었고 그로 인해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규정된 신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는 법률 공부에 앞서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철학공부를 했는데 이때 오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유명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대체로 평이한 대학생활을 했고 성악, 기악 등 음악과 시에도 깊은 소양과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후 법학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한 벼락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길에서 벼락을 만나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적으로 느낀 루터는 참회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자리에서 수도사 서원을 했고 실제로 보름 후 엄격한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루터의 영적시련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았고 마침내 스승 슈타우피츠의 도움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권유로 비텐베르그로 옮겨가 박사학위를 목표로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비텐베르그 생활 5년여는 루터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95개조항의 대자보를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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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09/13/15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Published 0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