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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은 신앙고백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보는 것은 효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방법이 됩니다. 이제부터 시대 구분에 따라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함께 바라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신학 초대교회는 주후 600여년 즉 그레고리 교황 이전까지로 보며, 다시 로마에 의한 박해의 시가인 전반300년과 기독교 공인 이후 중세까지 이어지는 후반 300년으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주제어로는 순교와 금욕주의 그리고 이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순교란 예수를 따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과 결과입니다.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 기록된 페르페투아를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스스로를 산 제사로 드린 순교의 현장에서 마지막 찬송으로 글로리아 파트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의 첫 부분을 부르며 스스로를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성부 성자와...
Published 03/29/15
한국 교회와 이단 문제 - 이단과 신학·신앙의 확립 : 성경에서 이단은 예수의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 교회공동체를 분열하게 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단에 대해 ‘내가 믿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 되었습니다. 즉 초대교회 때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비추어 봄으로써, 중세교회 때는 교회권위에 대한 도전이 곧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종교개혁 때는 개혁자들의 신앙고백과 기록에 따라 이단이 규정되었고 근현대교회에서는 오직 성경만을 중심으로 이단이 규정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이단은 교회를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이단의 도전은 늘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 이단과 교회의 정체성 : 어째서 이단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답은 세상 마지막 때의 예언으로써 그리고 우리 신앙훈련의 도구로 주어진 것으로 할 수 있으며 결론적으로 마침내 교회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굳게 해줍니다. 더욱이 이단은 사회적 혼란기와...
Published 03/22/15
한국 이단의 특징 분석 - 미국이단의 특징 (5Ps, prophet, promise, plan, possibility, place) : 북미 뿐 아니라 모든 이단을 분석하는 틀은 주로 이 다섯가지에 의존합니다. 즉 단체의 설립자 또는 지도자와 교리, 그리고 그 교리의 현실화 계획가 가능성 그리고 근거지의 마련 등입니다. 이 틀에 따라 분석한 결과 고학력, 전문직종 종사자가 이단에 미혹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습관과 정보 그리고 사고와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의 경우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이단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단 피해자을 치유, 회복시키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 한국이단의 특징 (한국적 적용) : 위에서 언급한 다섯가지 틀에 의해서 한국이단의 특성을 규정할 수 있으며 창교형, 혼합형, 개조형, 위조형 등 전북대 이광오교수의 유형분류는 더욱 한국적으로 적절히 적용 가능한...
Published 03/15/15
- 북미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한 이단들이 발흥 : 미국의 기독교는 서유럽 기독교가 전래되었는데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과 신앙의 자유 보장에 따라 다양한 교파주의 교회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전되었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2차 각성운동 당시 미국교회는 교파주의에 몰두했고 이를 틈타 이단이 참된 교회를 주장하며 발흥하였고 정통교회의 압박에 따라 서부로 이전하여 터전을 잡게 되었습니다. - 한국 기독교이단 발흥에 끼친 북미 교파주의 선교와 이단 : 구한말 미국교파주의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안식교를 비롯한 미국 이단 또한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하에서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국 기독교에 신비주의 활동의 경향이 표출되면서 비성경적 운동이 발흥하고 이때 이단은 급격히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북미 이단들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구원파, 섹스교 등이었습니다. - 적용사례 몰몬교 : 몰몬교는 대표적 북미이단으로서 북미의 극심한...
Published 03/08/15
기독교 이단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이단을 알고 대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성경을 바로 알고 우리 신앙을 교회 안팎에 선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단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으며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서 신학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아왔습니다. 한국전쟁과 이단발흥 - 한국전쟁은 본격적인 이단발흥의 시기 : 한국교회사에서 한국전쟁은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하였고 이와 함께 이단이 피난지 부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흥한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이단들이 집중 발흥한 원인들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 :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가 부흥할 때 교회의 분열 등 위기가 함께 있었고 이때마다 이단이 발흥하였습니다. 부산 피난지로 기독교의 중심이 남하할 때 서북지역에 자리 잡았던 이단들도 함께 남하하였고 마침...
Published 03/01/15
강원지역 교회사, 선교지 분할 협정의 체결과 파기 당초 감리교 선교지역이었던 강원지역에 장로교회가 선교를 시도하면서 총회차원에서 선교지 분할협정이 파기되자 강원지역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즉 강원지역 선교를 놓고 감리교와 장로교가 경쟁관계에 돌입할 것입니다. 장로교의 지역교회와 노회는 강원지역 선교를 위해 선교목사 파송을 총회에 청원했고 이에 따라 총회가 검토 후 허락함에 따라 주로 서북지역출신 선교목사들이 철원, 장전, 강릉, 춘천 등지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1942년 총회가 묵호에 전도목사로 파송한 김우일 목사만은 예외적으로 서북지역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끝내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장로교회는 1946년 강원지역 교회들을 경기노회에 편입시켰고, 이후 1946년에는 영동지역 교회들을 경북 경안노회에 소속시켰습니다. 한편 광복 후 서북지역에 공산정권이 서자 신앙의 자유를...
Published 02/22/15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2015년 2월 15일 방송
Published 02/15/15
2. 성육신 사건들 국민 계몽운동 1904년 김정식 등 연동교회 교인이 된 옛 독립협회 인사들은 담임목사 게일의 집에서 국민계몽을 위한 교육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개혁의 수단이 봉쇄되자 뒷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교과서 편찬과 교사양성, 학교건축 등의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담임목사 게일이 회장인 기독교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는데 특히 구국차원의 체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신식학교 설립 한편 연동교회는 나중에 경신학교가 된 예수교중학교를 설립하여 식물학, 지리, 산술, 화학 등과 함께 조선역사, 한문 등을 가르치며 조선에 대한 자긍심과 자의식을 갖게 하였고 1904년부터는 물리, 수학, 화학, 천문학 교육을 통해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발달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연동교회 교인이 된 사대부들은 교사가 되어 한문과 우리 전통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담임목사인 게일은 유몽천자를 저술하여 교재로 삼았는데 이러한 일련의...
Published 02/08/15
선교 초창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주 대상은 일반 대중과 여성, 서민 등 사회 하층민들이었습니다. 반면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층부는 서양 문명 특히 미국의 문명을 접하고 깨우치면서 이를 우리 국가와 사회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스스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에 이어 19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한 때였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던 사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고위 관료 중심의 사대부들은 독립협회를 출범시키고 부정부패의 척결, 외세 배격, 입헌정치를 주장하였으나 모함에 의해 이듬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902년 6월,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 등 전 독립협회 회원들이 역모혐의로 의금부 감옥에 투옥된 개혁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투옥된 2년여간 옥중에 도서실이 설치되고 여기 성서공회가...
Published 02/01/15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은 WCC활동으로 대변됩니다. 따라서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사 두 번째 시간은 1948년 1차 총회부터 2013년 제10차 총회까지를 살펴봅니다. 1. 1948년 암스테르담 총회 주제, 질서의 하나님. 44개 국가, 146개 교단 및 교회 참여. WCC창립 결의. 동서 양진영간의 긴장 발생 2. 1954년 미국 에반스톤 총회 주제. 소망. 인종차별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논의 활발. 3.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 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회원의 급격한 증가. 국제 선교협의회 합병.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논의. 총회 후 바티칸 공의회 소집 예고 4. 1948년 스웨덴 웁살라 총회 주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변화).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 재고. 분배에 대한 논의. 5 1975년 케냐 나이로비 총회 주제. 예수 그리스도 해방과 일치. 선교유예론의 등장, 신앙과 과학 문제 - 핵무기는 범죄, 가난에 대한...
Published 01/25/15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17세기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 후 20세기 까지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절되었고 이후 WCC를 통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 선교로부터 비롯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17세기까지 개신교는 유럽중심의 종교였으나 항해술의 발달과 영국의 종교탄압으로 그 중심이 신대륙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때 유럽에서는 항로개발과 함께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선교를 시작하였고 18세기 선교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세계선교지원을 위한 신앙단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때 발생한 세계선교에 대한 열정은 신대륙으로 옮아갔고 이후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선교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선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2. 연합으로 비롯된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를 향한 뱃길이 열리면서 1846년 런던에서는 개신교연맹이 결성되고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Published 01/18/15
5. 사회봉사활동으로 나타난 일제치하의 에큐메니칼 운동 다. 한국교회역사는 주일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 감리교회로부터 시작된 주일학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활발히 교류하고 교제를 직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10개 교단과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을 조직하는 등 연합과 일치운동을 매우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 6. 광복 후 에큐메니칼 운동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교회는 화해를 과제 삼아 WCC를 창설했고 한국교회는 여기 참여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던 세계교회와의 관계 복원의 전환점으로 삼았습니다. 7. 1950년대 중. 후반 NCCK의 활동 당시 NCCK회장 한경직목사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을 주도했고, 동아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자 아시아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며 한국교회 참여에 앞장섰습니다. 8. 칼 메킨타이어의 WCC반대운동 근본주의자인 그는 한국교회 안에 근본주의 신학을 확장시켰고, 재정지원을 통해 교단분열을...
Published 01/11/15
에큐메니칼 운동은 연합운동이며 상호협력과 일치운동입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시대별로 살펴봅니다. 1. 선교초기 성경번역을 위한 연합활동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는 선교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성경은 하나’라는 아주중요한 한국교회 전통을 확립했고 이로부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2. 공의회 구성을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 이후 장로교회의 경우 3개국 4개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했고 이후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공의회를 조직해 하나의 개신교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24년 오늘날 NCCK가 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설립을 통해 연합과 일치운동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3. 문서 선교로 진행된 에큐메니칼 운동 또한 연합으로 잡지를 발간하고 각 교단별로 발간되던 신문도...
Published 01/04/15
WCC를 둘러싸고 한국교회 안에서 60년째 이어지고 있는 논쟁과 오해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이번 주는 세 번째 항목부터 살펴봅니다. 3. WCC의 선교유예론 이 논쟁은 WCC도 과연 선교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데, 19세기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에 나서면서 서로 협력하였고 이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10년 세계선교대회를 열고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를 창설하였으며 1948년에 이르러 WCC를 창설하였습니다. 즉 WCC는 선교를 위해 선교현장에서 출발한 단체이므로 이런 논쟁에 이른 의혹은 불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혹의 출발은 1960년대에 본격화된 제국주의선교에 대한 논란과 이에 따라 1971년부터 지속된 선교유예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유예는 결의에 이르지 못했고 대안으로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즉 식민정책에 수반된 제국주의 선교정책을 반성하고...
Published 12/28/14
WCC와 한국교회 2013년 WCC 제10차 부산총회가 유치된 2008년부터 총회가 끝난 지금까지 WCC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분란과 논쟁과 매우 격렬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논쟁이라기보다는 1950년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단 분열의 한 단초가 되었던 WCC를 둘러싼 논쟁의 재연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WCC와 한국교회의 만남은 1948년 WCC 1차 총회에 한국장로교회 대표가 참석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제1차 총회에 참석한 한국장로교회대표가 귀국 보고하고 이어서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954년 제2차 총회 참석을 위해 대표 파송을 결정한 즈음 WCC의 단일교회 추진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제3의 분열을 염려하던 장로교회 총회는 위원회 연구활동을 통해 총회입장을 정리하였으나 의혹을 불식하지 못한 승동측이 WCC의 용공. 신신학. 단일교회 지향 의혹을 주장하며 WCC영구탈퇴와 에큐메니칼 운동...
Published 12/14/14
70년대 이후 교회 여성 교회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한 여성 60년대 산업화와 함께 한국교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 교회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손잡은 일부 목회자들은 작은교회를 추구하였고 또 다른 제3의 목소리는 바로 여성들로서 물량적 성장에 치우친 대형교회를 향한 일침을 가하며 모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사랑운동을 전개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즉 남성과 투쟁하기보다 조화를 이룸으로써 남녀 모두가 자유하는 인격체로서 동등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여성이 여성됨에 자긍심을 가지는 여성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계속교육원을 설립하고 여전도회관을 설립하여 마침내 여성안수를 실현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교회 여성 철기문명으로 대표되는 현대문명이 가져온 온갖 폐해는 생명이 결핍된 문명이라는 반성과 함께 미래에는 부드럽고 생명을 살리는 문명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여성적 리러십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Published 12/07/14
1930년대와 해방 이후 교회여성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장로교 안에서는 함남노회에서 청원되고 가결된 여성들의 치리권 청원이 1933년과 이듬해 거푸 부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치리권 찬반 목회자의 기독신보 기고가 논쟁으로 발전하며 끝내 찬성론자의 주장 철회가 마감되면서 교회내 여성관련 질서가 봉건주의 질서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보수회귀 성향과 보수성은 5년후 신사참배 결의로 무너졌고 끝내 한국교회의 소멸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교회 여성들은 상위기관인 총회 의결을 정면 거부하거나 침묵함으로서 소수의 남은 자가 되어 신앙 양심과 신앙의 순결을 지켜 후일 교회 재건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교회는 공산세력과의 투쟁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참회할 기회를 놓쳤고 남한교회는 이 문제를 놓고 분열을 거듭하며 참다운 참회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도회는 이와는 반대로 일치의 역사, 살리는 역사를 써내려가기...
Published 11/30/14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교회여성 한국교회 초창기에 복음으로 인한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 여성의 의식변화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 교회여성들은 1898년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여전도회를 조직했습니다. 여전도회는 전국 곳곳으로 조직이 파급되었고 이후 여전도회지방연합회를 거쳐 1928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장로교총회의 법적 기관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여전도회를 축으로 한 교회여성의 교회 밖 활동은 교회여성들이 국가 주권의식을 갖추면서 성경 속 인물들을 따라 항일운동을 위한 의식으로 발전하여 항일결사단체 결성를 결성했고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임시 정부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이후 만세운동 참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설, YWCA 창설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근우회 창설 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편 교회 안의 여성 활동은 전도부인의 활동으로 대표됩니다. 전도부인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의 보조자로서...
Published 11/23/14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실현2 1977년 여성안수실현을 위한 여전도회전국연횝회의 활동은 보다 구체적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과과목에 여전도회를 포함시키고, 주일학교공과에 여성에 대한 의식 고취를 위한 과목을 삽입했으며, 미 장로교회 여성지도자를 초청해 경험을 듣는 강연회를 여는 등 보다 효과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90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전국노회장을 초청해 협조를 요청하고 신학대교수들을 통해 여성안수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는데 이들은 교회 안팎에서 남녀는 수평적 관계와 파트너쉽을 가져야 하며, 교인의 다수인 여성이 당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교회내 민주화에 역행할 뿐 아니라 비성격적이며 비사회적이고 주장했습니다. 마참내 1994년 79차 총회에서 토론없이 표결한 결과 여성안수가 의결되었고 이어서 각 노회에서도 통과되어 한국교회의 여성안수는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안수가 법제화는 되었으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인습과 전통적 교회문화에 얽매여 시대적...
Published 11/16/14
2000년대 교회의 평화통일 운동과 북한선교 북한체제 붕괴가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 한국교회가 90년대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나선 이후에도 북한 체제가 유지되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방향은 탈북자 선교를 통한 영적 성전 건축사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90년대 남한교회의 북한에 대한 시선은 낙관론과 신중론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장 통합교단은 교류와 소통을 추구하는 획기적 북한선교 정책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 결과로 97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접촉하여 밀가루를 지원하였고, 관련노회 즉 평양노회 차원에서 온실공급과 환자지원 사업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후 과거 존재했던 신학교 재건을 지원하고 평양제일교회를 건축함으로써 북한교회 재건의 꿈을 실현하게 되엇습니다. 이후에도 통합총회는 통일에 대한 선교정책을 정리하여 북한선교와 통일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여 평화선언을 발표하고 2005년에는 광복60주년을 맞아 남북교회지도자가 금강산에서 회동하는 등의 성과를...
Published 11/09/14
80년대 한국교회 양적성장의 시대에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물량적 성장에 몰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신앙인들은 1980년대부터 민족통일에 대해 각성하고 사회민주화와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통일논의는 NCCK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한창 부풀어 오르던 민주화의 꿈이 군부 독재정권의 재등장으로 무산되어 암울했던 시기에 독일개신교연합회와 NCCK는 에큐메니칼협의회를 개최해 한반도 통일에 관한 논의를 했습니다. 그 후 1984년 10월 WCC동북아정의평화협의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통일의 생기를 불어넣었고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제1차 남북기독자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남북교회 당사자가 자리를 마주하는 역사적 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 2월에는 NCCK가 37차 총회를 통해 ‘민족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 즉 88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선언은 죄책고백으로 시작하여 5개의 통일원칙과 정부에 대한 제안...
Published 11/02/14
1960년대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도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물량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 때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표어에 나타난 대로 물질적 번영 추구 의식은 성장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사회의 경제성장은 교회의 경제 사정 호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교회의 힘으로 축적되었으며 특히 70년대 서울 강남개발과 이에 따른 교회의 급성장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물질적 성장 이데올로기는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축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물질적 축복에 몰입하는 기복신앙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축복에 따른 책임 즉 축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신앙을 통해 한국교회 교인의 신앙이 사적인 영역에 갇히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즉 물질의 축복을 교회의 본질인 공적책임을 수행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내 교회 성장을...
Published 10/26/14
이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1960년대부터 놀라운 성장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삼십여 년 간 지속된 성장은 최단 기간 동안에 이룩한 매우 놀라운 것으로 일찍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큰 배경은 사회의 산업화입니다. 즉 1960년대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한국교회는 이를 기반으로 물량적 성장 즉 교인수와 재정의 성장을 이룩합니다. 반면 농어촌 인구와 함께 농어촌 교인이 대도시로 이주하여 도시교인으로 변모하면서 농어촌 교회는 쇠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 일변도가 치닫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특별히 물량적 성장 이데올로기는 인구가 감소하는 등 이전과 구별된 현실 속에서도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상태입니다. 당시 삼십 여 년간 서울의 인구는 네 배 증가였고 그 기간 한국교회의 수는 일곱 배나 늘었습니다. 이는 50년대 북한교인이 월남하여 북한교회를...
Published 10/19/14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 발발로 시작하여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된 가운데 온 국민이 극심한 고통과 절망을 겪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때 교회는 주어진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1952년 1차 분열로 고신교단이 분립하고 이어서 1954년 2차 장로교 총회의 분열로 기장교단이 탄생한 이후 교단분열의 여파는 각 노회와 개 교회의 내부 갈등과 분쟁으로 번져갔습니다. 그러자 분열된 장로교단을 하나로 이끌 지도자로 이원영목사가 총회장에 추대되어 1934년 신사참배결의 취소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교단통합을 위해 힘썼으나 1959년 3차 분열로 합동과 통합교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립의 배경에 대해서는 양 측이 신학교공금사기사건과 WCC문제로 각각 다른 인식을 가지고 오늘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분열사태에 대해 한경직 목사는 장로교의 전통은 상호 연합과 협조이고 WCC와 결별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Published 10/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