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8] 기독교인이 된 유림선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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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육신 사건들 국민 계몽운동 1904년 김정식 등 연동교회 교인이 된 옛 독립협회 인사들은 담임목사 게일의 집에서 국민계몽을 위한 교육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개혁의 수단이 봉쇄되자 뒷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교과서 편찬과 교사양성, 학교건축 등의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담임목사 게일이 회장인 기독교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는데 특히 구국차원의 체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신식학교 설립 한편 연동교회는 나중에 경신학교가 된 예수교중학교를 설립하여 식물학, 지리, 산술, 화학 등과 함께 조선역사, 한문 등을 가르치며 조선에 대한 자긍심과 자의식을 갖게 하였고 1904년부터는 물리, 수학, 화학, 천문학 교육을 통해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발달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연동교회 교인이 된 사대부들은 교사가 되어 한문과 우리 전통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담임목사인 게일은 유몽천자를 저술하여 교재로 삼았는데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 연동교회 게일 담임목사는 선교사 가운데 유독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한글번역에 힘썼습니다. 그는 한학자인 이원모, 이창직, 이교승 등과 함께 성경번역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한글 신구약 성경이 완간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물질과 함께 정신의 근대화를 이룩한 쾌거이며 복음이 토착문화로 성육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안동교회를 세운 선비들 안동교회의 별명은 양반교회입니다. 이는 연동교회가 천민거주지에 있던 것에 비해 안동교회는 양반들의 거주지인 북촌에 자리했기 때문이며 출석교인 대부분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동교회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던 유성준 등이 북촌에 분립한 교회로서 선교사 없이 한국인 스스로 세우고 일구어 나갔으며 초대목사도 한국인 한석진 목사가 역임하는 등 주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안동교회 박승봉 장로는 중앙의 고위공직자로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건의 배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실각하여 변방이 영변관찰사로 지내던 중 남강이승훈을 앞세워 기독교 신식학교인 오산학교를 세움으로써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후 박승봉 장로가 중심이 되어 1909년 안동교회가 창립될 때 양반들이 많기는 했어도 전통유지 보다는 개역의 열기가 높았고, 사회 특권층만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열린 교회, 소통하는 교회를 지향하였습니다. 4. 북간도로 이주한 선비들 1899년 함경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학자 네 가문의 25세대, 142명이 북간도로 이주,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조상의 땅을 회복하고 새로운 땅에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며 나라의 운명을 걸머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이주했는데, 먼저 땅을 구입해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서당식 교육을 시작했으며 이후 1904년 신식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고 헤이그 사건으로 학교가 타격을 받아 폐교되자 1908년 명동서숙을 세웠습니다. 여기 정재면교사가 부임하며 기독교학교가 되었고 이로써 교회와 학교가 함께 있는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능한 교사를 유치하여 신식과목과 체육과목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 등을 고양하기에 힘썼습니다. 더 나아가 정재면교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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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09/13/15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Published 0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