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2]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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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 앞서 살펴본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 내부의 정치역학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모든 면에서 이와는 매우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스위스에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즉 중앙집권 정부가 존재한 경험이 전무했으며 지리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기대있어 골짜기마다 작은 부락을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291년 호수가 많은 루체른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마을이 계약연방체를 결성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연방체에 각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점차 발전되었으나 중앙집권체제로 가지는 않았고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할 뿐 각 지역 대표 두 명씩이 정기적 회합을 통해 만장일치로 모든 사안을 의결하는 등 각 지역의 자치권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체제를 굳히게 됩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취리히는 이 계약 공동체에 공동체 결성 뒤 60년 후인 1351년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도시국가 취리히는 인근 짤츠부르그의 소금과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교역하는 국제 상업, 무역 도시였습니다. 이 때 취리히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정치와 행정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즉 취급품목별 동업조합인 길드 형태의 쭘프트를 결성한 상인, 수공업자, 금융가 등이 직종을 대표하는 162명으로 대의회를 구성해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따로 동업조합 대표 25명으로 구성된 소의회가 행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의회는 주로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도덕과 윤리에 기반을 둔 건강한 사회 조성에 관심을 두어 두 기관은 종종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등 늘 긴장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반면 취리히 근교의 농촌마을 사람들은 행정 관료가 될 수 없이 소외되었으며 소의회의 청빙을 받아 추진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도 취리히 행정당국과 긴밀히 결속된 도시기반의 개혁이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농민중심의 개혁세력은 나중에 재세례파로 분립하게 됩니다. 당시 인구 약5천여 명으로 바젤이나 제네바의 인구 만여 명에 비해 절반 정도에 그쳤던 국제무역도시 취리히는 소금과 곡물, 가축, 견직물 등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고 수공업이 침체되면서 16세기 들어 큰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기반을 잃은 세력이 농촌지역에 진출하려했으나 기존 농민과 충돌하게 되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진출할 곳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인근 국가들 간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에 참여하여 수입을 올린 용병들이 귀국하면서 그 임금을 유흥비 등으로 탕진하는 등 윤리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자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시를 구원할 정신적 지도자로 개혁자 츠빙글리를 청빙하게 된 것입니다. 2.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도시가 아닌 농촌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농촌의 작은 단위 지도자였습니다. 스위스의 농촌은 주로 밭농사와 초지에 기반을 둔 목축으로 이루어 졌는데 목축의 경우 험준한 산악지형과 혹독한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두레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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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09/13/15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Published 09/13/15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Published 09/06/15